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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2018 유럽여행기

[런던] 4. 쇼디치 하이 스트리트, 머리를 자른 날

 오늘의 일정은 쇼디치 하이 스트리트였다. 컨테이너 박스 같은 건물들, 벽에 가득한 그래피티와 포스터. 인디 예술혼이 담겨 있는 동네 같았다. 문제는, 비가 미친듯이 왔다는 것이다. 여행자 입장에서는 전혀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Pogboom

 

 적당히 기다리면 그치겠지 하던 비는 오전 내내 퍼부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몇 시간이고 퍼붓던 장대비는 점심 시간 쯤 되니 스프레이 정도의 세기로 바뀌었다. 세인즈버리에서 Meal Deal을 샀다. 동네를 구경하며 먹을 계획이었다.

 

 참 힙한 느낌의 동네였다. 세인즈버리산 샌드위치를 씹어먹으면서 골목 골목을 돌아다녔다.

 

 친구가 머리를 자른 곳. 이발사 아저씨가 알제리 출신라고 했던 것 같다. 머리를 괜찮게 잘라주면 나도 여기서 자르려고 했는데, 친구 머리를 너무 군인처럼 잘라놔서 여기서 자르지 않기로 했다. 가격이 10파운드라, 못 잘라도 이상하지 않은 가격이긴 하다. 머리가 맘에 안 든 것과는 별개로 이발사 아저씨는 매우 친절하셨다. 커피도 한 잔 대접해주시고 - 비록 수돗물로 끓인 인스턴트 커피지만 - 머리 자르는 내내 말을 걸어오셔서 좋았다.

 

 Rough Trade는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음반 가게다. 인디 음악들을 많이 걸어주곤 하는 가게란다. 친구가 정신없이 구경하는 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녔다.

 

 내가 머리를 자른 곳이다. 영국인 바버는 내 수북한 파마머리를 양털 깎듯이 잘라냈다. "남자가 왜 펌을 했냐." 같은 말도 했다. 영국엔 왜 왔냐고 묻길래 영국이 좋아서 왔다고 대답했다. 토트넘에 Park이라는 선수가 뛰지 않냐고 묻길래 그건 옛날 맨유고 지금은 Son이라고 하니까 맞다고 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러 갈 것이라고 하니 또 재밌어했다. 그 나라에 관심이 있어서 갔기 때문에, 항상 현지인들과의 대화 소재가 마르지를 않았다. 재밌게 이야기하는 동안, 내 머리는 엄청나게 가벼워졌다.

 친구는 생각보다 유럽 스타일 머리가 내게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나는 살짝 얼떨떨했지만, 적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마를 확 드러낸 머리는 갓난애때 빼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파격적인 이미지 변화를, 일상 속에서는 시도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여행을 왔기 때문에, '안 어울리면 다시 기르면 되지...' 생각하고 지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결과는 성공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공짜 신문을 받았다. 요시다 마야가 나와있었다. 토트넘과 사우스햄튼이 경기를 한 모양이었다. 영국에 도착한 첫 날, 프리미어리그 어플에서 경기가 시작했다는 알림이 왔다. 벌건 대낮에. 항상 한국에서는 자고 일어나면 새벽에 떴었던 알림을 확인하곤 했는데, 영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순간 중 하나였다.

 

 오늘 저녁은 진짜배기 피쉬 앤 칩스였다. 어디든 주택가 근처에는 튀김 가게가 있었고, 거기서는 피쉬 앤 칩스 뿐만 아니라 온갖 치킨이며 피자며 하는 것들을 팔았다. 케찹 대신 소금, 식초, 마요네즈를 뿌렸을 뿐인데, 한국에서 먹던 튀김과는 전혀 다른 맛이 되었다. 만들어내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루의 마무리는 동네 펍에 가서 했다. 나는 롱 티를, 친구는 기네스를 마셨다. 유럽 여행 중 가장 진입장벽이 높은 곳이 술을 마시는 곳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이 술집은 좀 점잖아서 망정이지, 대부분 술집은 유리창에 김이 서릴 정도로 후끈하고 열정적인 분위기여서, 혼자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동행이 있을 때, 아니면 게스트하우스에 딸린 술집이 있을 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술집이었던 것 같다. 펍에 가서 축구를 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는데, 위와 같은 이유로 실천하지는 못했다.

 런던에서의 시간은 너무나도 잘 갔다. 하루만 더 지나면, 친구와 떨어져서 다음 목적지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