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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2018 유럽여행기

[런던] 1. 런던에서의 첫날, 쉴 틈 없는 도시 구경

 여행의 시작과 끝은 교환학생 친구의 숙소가 있는 네덜란드였지만, 여행의 정수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다. 왜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동안 유럽의 유명한 관광지를 싹 훑을 수도 있는데, 굳이 영국과 아일랜드를 가고 싶어했을까? 그 섬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오아시스, 뉴캐슬 유나이티드, 축구, 비틀즈, 영화 원스, 제임스 본드, 제임스 베이, 기네스 흑맥주, 셜록, 그런 것들이 너무 좋아서, 그것들이 태어난 땅에 가고 싶었다. 무용담을 많이 만들 수 있는 관광지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곳에 가는 것이 더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아시안 마켓에서 큰맘먹고 산 김치사발면을 아침으로 먹고 아인트호벤 공항으로 향했다. 우버를 불러서 새벽에 공항으로 향했다. 택시비는 몇만원쯤 했던 것 같은데, 여행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감수했다. 비행기표가 값싼 시간대인 새벽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면, 그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비싼 택시비를 지불해야 하는 이상한 상황이 생긴다. 물론 그렇게 택시비를 내더라도 좋은 시간대의 비행기 요금보다는 싸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거지만.

 

 여행 내내 든든한 친구였던 라이언에어를 타고 한시간 반쯤 날아가니 런던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마자 너무 배가 고파서 버거킹을 사먹었다. 종업원이 영국 락스타같은 시크한 발음으로 주문을 받았다. 와퍼는 그냥 와퍼 맛이었고 감튀도 그냥 감튀 맛이었다. 하인즈 케찹도 오뚜기 케찹이랑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평소와 달랐고, 그 차이 때문에 몹시 들뜬 상태였다.

 

 히스로 공항에서 빅토리아 역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사실 버스 안에서는 런던에 왔다는 자각을 크게 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지하철에 들어서자 런던 느낌이 확 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것과 똑같이 생긴 지하철이 눈 앞에 펼쳐지자 설렜다. "Mind the gap"이라는 안내방송이 들리자 한번 더 설렜다. 하지만 설렘은 잠시였다. 와이파이도 안 터지고, 공간도 지나치게 좁았다. 한국 지하철에 비하면 양문형 냉장고와 미니 냉장고 수준의 크기 차이가 있었다. 만약 여름에 온다면 얼마나 덥고 불쾌할지 상상하니 한번 더 아찔했다. 그래도 런던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지하철을 타고 있으니, 지금 런던에 와 있다는 느낌이 확 들어서 좋았다.

 

 짧지 않은 런던 여행의 숙소를 Kensal Green에 잡은 이유는 적당한 가격과 적당한 입지를 가진 숙소가 위치해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숙소도 정말 좋았다. 오아시스나 비틀즈 노래를 들으며 걷기 좋은 전형적인 영국 주거지구 같은 동네였다. 하루 일정을 끝내고 동네로 돌아올 때, 그리고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정말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될 수 있었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서 곧장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너무 노곤했지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짐을 풀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처음 간 곳은 노팅힐이었다. 축제 기간이라고 해서 가 보니 노점상과 인파가 한 블록을 가득 메우고 있을 정도로 축제가 한창이었다. 구경거리가 참 많았는데, 여행 첫날이라서 돈을 아낀답시고 딱히 뭘 사진 않았다. 대신 음식은 사 먹었다. 너무 맛있어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빠에야가 예술이었다. 말이 빠에야지 그냥 해산물 볶음밥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런던에서 먹으니 느낌이 색달랐다.

 

 노팅힐 주변을 걸었다. 정말 좋아하는 나라의 좋아하는 도시를 왔을 때 장점은, 딱히 특별한 곳에 가서 특별한 것을 하지 않고, 그냥 걷기만 해도 기분이 엄청 좋아진다는 사실이었다. 항상 화면 속에만 있던, 내가 동경하던 런던의 거리를 걸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다. 지하철 표시만 봐도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목적지는 애비 로드였다. 비틀즈의 Abbey Road 앨범 커버를 찍은 그 횡단보도에 가 봤다. 사진을 찍으려는 인파가 우글거리는 반면, 차들이 자비없이 쌩쌩 지나갔다. 관광객들에게나 특별한 횡단보도고, 현지인들에게는 그냥 지나야 하는 도로에 불과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애비 로드 스튜디오도 먼발치에서 보았다. 담장에는 비틀즈를 그리는 낙서가 가득했다. 비틀즈 팬들이 남기고 간 성지순례 열기의 흔적같았다.

 

 애비 로드 스튜디오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옆 건물의 비틀즈 박물관은 들어갈 수 있었다. 쏠쏠하게 구경할 수 있는 전시품들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 트라팔가 광장에 갔다. 역시 수많은 인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인파에 걸맞는 수많은, 또한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하는 거지들, 그리고 예술가와 버스커들이 있었다. 수준이 괜찮아서 괜히 적선하고 싶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손목 같은데에 끈을 묶어주고 몇 파운드를 챙겨가는 날강도들도 있었다. 아무리 불쾌해도 런던 첫날 밤의 추억이라고 생각하니 아련하게 느껴졌다.

 

 밤의 일정도 낮과 비슷했다.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런던을 걸어다닐 뿐이었다. 하지만 별 것 없는 그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 영국스러운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마주할 때 너무 기분이 좋았고, 전광판에 축구팀 광고가 나올 때 여기가 런던이구나 싶어서 즐거웠다. 연말 분위기를 돋궈주는 건물 사이사이 조명 장식물들도 너무 예뻤다.

 

 집에 돌아오는 역이 킹스 크로스여서, 기차를 타기 전에 역을 슬쩍 구경했다. 정말 늦은 시간이었지만 역은 해리포터 팬들로 가득했다. 전설의 9와 3/4 승강장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줄, 그리고 기념품 샵에 들어가려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적당히 길면 들어가서 구경할 엄두라도 났을텐데, 해리포터 팬이 아니면 결코 기다릴 수 없는 길이의 줄이어서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동네 케밥집에서 작은 피자 두 판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함께 여행했던 친구와 나는, 런던의 랜드마크를 여행하는 시간만큼이나 이런 현지인의 일상에 가까운 순간들에 설렜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니, 일상과 같은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여행이 더 즐거웠던 것 같다. 짧게 런던을 훑고 지나간다면 보낼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고, 느낄 수 없는것을 느꼈기 때문에, 여행의 순간들이 더 소중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정말 많은 것을 한 것 같았지만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서 더욱 기뻤다. 다음 날 일정을 위해 늦지 않게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