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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2018 유럽여행기

[네덜란드] 2. 틸버그에서 한적한 일상 보내기

 다음날 아침, 워낙 한적한 도시고 관광지도 아니라 그런지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했다. 옷을 챙겨 입고 거리로 나갔다. 바람이 좀 과하게 불긴 했지만, 햇살도 너무 따스한 그런 날이었다. 친구는 신기해했다. 틸버그에 온 뒤로는 쭉 우중충한 날씨였는데, 오랜만에 해를 본다고 했다. 보기 드문 햇빛이라고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커봤자 이층쯤 되는 주택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예뻤다. 길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도 예뻤다. 고양이가 예뻤던 이유는 기분이 좋아서겠지만, 도시 전경이 예뻤던 이유는 도시가 예뻤기 때문인 것 같다. 하늘을 뒤덮는 전깃줄도 없고, 아무렇게나 지어진 건물도 없고, 보도블록도 예쁘게 깔려 있고, 그런 것들이 오밀조밀 모여서 예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네덜란드 마트는 괜히 달라보였다. 빵이 큼직큼직하고, 개수도 여러 개씩 포장되어 있었다. 코스트코나 이마트의 제빵 코너를 연상하게 했다. 햄과 고기 코너는 한국에서 본 적 없는 비주얼이었다. 포장된 고기들이 색깔만 살짝 다른 수준인 것들도 있었는데, 완전히 다른 이름과 가격을 하고 진열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에 한 달 정도 살았으면 하나씩 맛을 보고 싶은 그런 비주얼이었다. 과자 코너는 그냥 눈으로 훑고 지나갔다. 딱 보기에도 혀가 아릴 정도로 달게 생겼기 때문이다.

 

 돌아다니다 보니 추워서 몸을 녹이기 위해 카페에 들어갔다. 유럽엔 아메리카노가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진짜 없었다. 대신 "커피"라는 메뉴가 있었다. 주문하자 저런 작은 잔에 물을 탄 에스프레소 같은 게 나오고, 프림과 설탕, 쿠키 한 조각도 같이 나왔다. 양은 적은데 괜히 든든해 보이는 구성이었다. 물론 한국에서는 오직 아메리카노에 혀가 길들여져 있어서 커피에 다른 것을 넣지 않았지만, 여기선 괜히 넣어먹어보게 되었다. 달큰하고 따끈한 커피가 목을 지나 몸을 데워주었다.

 

 마요네즈를 뿌린 감자튀김을 먹었다. 마요네즈에서 약간 신 맛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한국에 와서 꼭 시도해봐야겠다 생각했는데, 다녀온 지 한참 뒤인 지금도 시도하지 않은 조합이다. 이 글을 쓰다보니까 감자튀김을 사다가 시도해보아야지, 생각이 든다.

 

 또 다른 마트에 갔다. 여기 고기 코너는 더 장관이었다. 살코기처럼 생긴걸 하나 샀고, 뭔가 내장처럼 생긴 "파테"라고 읽히는 재료를 샀다. 또 축배를 들기 위해 포트와인 한 병을 샀다. 사실 포트와인이 뭔지도 모르고 샀다. 새까만 병과 강렬한 빨강 글씨가 맘에 들었기 때문에 샀다. 그리고 인생 중 제일 맛있는 술을 마시게 되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브랜디와 와인을 섞은 거라고 하는데, 적당히 달짝지근하면서 강한 술이라 좋았다.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국에선 엄청 비싼 돈을 줘야 사 먹을 수 있어서 지금까지 마시지 못했다. 안주로 올리브 절임과 치즈 같은 것도 몇 개 샀다. 정말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면, 하루에 한 번씩 마트에 가서 궁금한 거 세네 개씩을 사다 먹었을 것이다. 그만큼 맛있어 보이고 궁금해 보이는 식재료가 마트에 많았다.

 

 친구가 저녁을 해주겠다며 만들어준 돼지고기 덮밥. 맛은 적당히 있었다. 노란 가루는 생강을 썰어넣은 것인데, 저게 나쁘지 않았다. 일식 같은 맛이 났다. 밥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입자가 씹힐 정도로 된밥이었다. 그래서 더 일식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술과 맛있는 안주를 먹으며, 노래를 듣다가, 노래를 부르다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하염없이 밤을 보냈다. 흘러가는 밤이 아까웠고, 자야 하는 밤도 아까웠다. 앞으로 흘러갈 하루하루도 아깝겠지, 생각했다. 도착해서는 격한 감흥이 없이 얼떨떨했는데, 점점 유럽에 와 있다는 사실을 머리가 이해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