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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2018 유럽여행기

[네덜란드] 1. 인천에서 스키폴로, 스키폴에서 틸버그로.

1. 인천에서 스키폴로, 스키폴에서 틸버그로.

 

 네덜란드에서 교환학생중인 친구가 사다 달라고 한 신라면 블랙을 챙겨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물론 신라면 블랙만 챙긴 것은 아니었다. 갈아입을 옷 몇 벌, 유심 칩, 아이패드, 그런 짐들을 챙겼다. 백팩 하나와 기내용 캐리어 한 개 사이즈만큼의 짐을 들고,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인천공항의 공기라는건 괜히 사람을 들뜨게 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의 설렘이 모여있는 공간이라서 그런 걸까. 물론 여권은 챙겨왔는지, 빼놓고 온 짐은 없는지, 탑승 수속은 언제 할지, 그런 궁금증들이 올라와서 마음이 괜히 급해지기도 한다.

 

 인천스러운 이벤트를 보며 비행기를 기다렸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체크인을 일찍 해서 좋은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아도, 장시간 비행은 불편할 수 밖에 없는 법이었다. 기내에 설치된 영화 두 편을 본다고 해봤자 5시간 정도 흐를 뿐이다. 다음에 장거리 비행을 하게 되면 핸드폰이나 아이패드에 볼 거라도 넣어와야겠다 싶었다.

 

 장거리 비행이 무료할까봐인지 항공사는 승객들을 정말 집요하게(?) 먹였다. 기내식은 그렇다 치는데, 중간에 간식으로 피자와 주스가 나왔을때 '정말 집요하게 먹이는구나.' 생각했다. 매 식사마다 와인을 받아 마셨다. 술을 마시면 잠이라도 잘 올까 해서... 별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스키폴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국제공항 이름이다. 이 글을 쓸 때마저 헷갈리는 스펠링은 Schiphol이다. 원어 발음은 "스히폴"에 더 가깝다고 되어있다... 입국 수속은 별로 까다롭지 않았다. 논 EU 승객인데도 네덜란드어로 먼저 말을 걸어주는게 인상깊었다. 사소한 디테일인데, 인종차별의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다. 나중에 쓸 여행기에서도 적겠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유럽만큼 다인종 사회가 아니라 그런지, 인종차별적인 표현이 스며들어있는 것 같다는 걸 많이 느꼈다. 입국 수속 때 나오는 질문 중 하나는 "어디에 갈 예정인가."이다. 친구가 살고 있는 틸버그에 간다고 하자, "거기 가족이 사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관광하러 가는 도시는 아니라서 하는 질문 같았다. 대충 주소를 보여주니 수월하게 넘어갔다. 유럽 어느 국가에서 입국 수속을 하든,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갈 것인지, 어디에 묵을 것인지. 이것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불편해진다는 후기를 종종 읽었다. 그래서 입국 심사 전에 항상 숙소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네덜란드의 주 교통 수단이라는 기차를 타고 암스테르담에서 틸버그로 향했다. 열차 내는 끔찍하게 조용했고, 열차 방송은 네덜란드어와 영어가 번갈아가며 나오는데, 기장의 말투가 너무 읊조리는 투이기도 했고, 스피커도 별로 좋지 않아서 제대로 듣기 힘들었다. 환승을 한번 해야 했어서 피곤했지만 졸 수도 없었다. 하염없이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갈 뿐이었다. 스마트폰을 보고 싶었지만 셀룰러가 터지지 않았다. 공항에서 유심칩을 끼울때는 정상적으로 된 걸 보면, 기차에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국내에선 고속으로 다니는 SRT를 타도 셀룰러는 물론 와이파이까지 제공되는데... 해외를 좀만 더 많이 다니면 애국자가 될 것만 같았다.

 

 네덜란드에서 네 번째인가 다섯번째로 큰 도시라는 틸버그에 도착했다. 네덜란드어로는 틸뷔르흐에 가까운 발음이란다. 방금 검색해보니 2015년 기준으로 인구가 21만이라고 한다. 딱 인구만큼 고요한 도시였다. 틸버그 기차역에서 친구를 만나 걸어가는 내내 들린 것은 캐리어 끄는 소리, 발자국 소리, 친구와의 대화 소리,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차 소리와 신호등 소리 정도였다. 숙소로 가는 내내 차보다 자전거를 더 많이 봤다. 애매하게 부러운 광경이었다. 도시 전경이 깔끔하고 덜 북적이는 건 부러웠지만, 그래도 지하철로 멀리 어디든 갈 수 있는 편리함은 없을 테니까. 건물들이 예뻤던 기억이 난다. 예술가의 도시라 그런지, 창틀이나 문의 색깔이 건물 전체의 포인트 컬러를 담당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서 괜히 그렇게 보인걸지도.

 

 친구가 사는 쉐어하우스에 도착했다. 각자 개인실이 있고, 화장실과 주방은 공동으로 사용하는 구조의 건물이었다. 밤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방학 기간이라서인지 안에 인기척이 별로 안 느껴졌다. 밥을 먹다가 하우스메이트 한 명을 본 것 같은 기억이 나긴 한다. 이방인인 내게 굉장히 살갑게 인사해줬던 것 같다. 유럽 교환학생의 친화력인가, 싶었다.

 

 비행기에서 사육당하다시피 밥을 먹었지만, 공항을 도착하고 기차를 타는 과정에서 다 꺼져버렸다. 교환학생인 친구의 없는 살림을 털어서 볶음밥을 만들고, 가져온 신라면 블랙을 끓여서 나눠먹었다. 볶음밥은 허기져서 맛있었지만, 비주얼과 다르게 자극적인 맛은 나지 않고 쌀과 햄 맛만 났다. 내일은 장을 봐와서 제대로 된 걸 먹자, 약속하며 허기만 채웠다.

 

 식사를 하고, 바로 자기는 그래서 동네 산책을 했다. 아까 역에서 숙소까지 걸어오면서 본 것과 같은 톤의 도시 풍경들을 지나 조금 걸으니, 운하가 있었다. 야경이 기가 막혔다. 넘실대는 강 물결이 지상의 모든 조명들을 더 예쁘게 흩트러놓은 풍경을 보고 서 있자니, 뭔가 벅차올랐다. 찬 밤 공기를 맞으며 캐리어를 끌고 네덜란드스러운 건물을 지나올 때부터 유럽에 왔다는 게 약간씩 실감이 나고 있었는데, 운하를 보니 그게 제대로 확 느껴진 것 같다. 내일의 일정을 기대하며, 숙소에 가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