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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도쿄여행기

[도쿄 여행기] 1. 오길 정말 잘 했어

[산겐자야, 시부야]



새벽 세시에 기상. 씻고 새벽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집 앞 정류장으로 나섰다. 다행히도 군자역은 버스 출발 역과 가까웠고, 그래서 공항버스 첫차를 꽤 이른 시간에 탈 수 있었다. 고등학교 수험생 시절 몽롱한 채 맞던, 온몸을 깨워오는 새벽 공기를 뚫고 정류장으로 향하는 나와 친구는 최고조로 설레 있었다. 예상외로 버스정류장에는 캐리어를 든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 있었다. 아침 시간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완벽히 제시간에 군자역에 도착했고, 예정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우리를 인천공항에 내려놓아 주었다. 여행을 여는 첫 시작은 매우 순조로웠다.



 그렇게 여유롭게 두 시간 전 공항에 도착했건만, 탑승 수속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서 첫 번째 역경을 겪었다. 외국에 나가본 것은 중학교 때가 마지막이었고, 그마저도 학교 선생님들이 다 해 주셨기 때문에 남아있는 기억이 전혀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가며 티켓을 받고, 출국 수속까지 마쳤다. 처음 덜컥 먹은 겁이 무색하게, 절차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비행기는 다섯 번 이상 타 봤지만, 이륙하는 순간은 여전히 긴장과 설렘이 반반씩 공존하는 순간이었다. 예상 시간은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 본가에 가는 고속버스를 타면 도착까지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 정도 걸린다. 옆 나라를 가는 데에 내 고향보다 더 적은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은 꽤 신선했다.

 진에어의 기내식은 중학교 때 먹었던 아시아나의 기내식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일본이 가까운 나라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티켓 값 만큼의 밥이 나오는건지, 공복을 간신히 때울 수준으로 나왔다. 출국장에서 어묵을 먹어 두기를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가져간 책을 조금 읽다가,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가,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리타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두 시간 반은 고향에 가는 길에 휴게소 도착하는 정도의 시간이니까,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 이동 시간이었다.



 나리타 공항의 첫인상은 따뜻함이었다. 독감이 유행이라고 해서 입고 간 패딩을 한없이 거추장스럽게 하는 날씨가 일단 그랬다.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패딩은 옆구리에 끼워진 채였다. 공항 직원들의 친절함 역시 따뜻했다. 일본어를 전혀 몰라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표정이나 제스처가 굉장히 친절했다. 드디어 일본에 도착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인천 공항과 나리타 공항이 풍겨오는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같이 간 친구는 일본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간단한 대화 수준의 일본어는 꽤 자신 있다고 했다. 겉으로는 "어디 얼마나 잘 하나 지켜보자." 하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친구에게 기대를 꽤 걸고 있었다. 나는 일본어를 전혀 못 했기 때문에, 친구마저 제대로 대화를 하지 못하면 남은 수단은 바디랭귀지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친구의 일본어 실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도쿄 지하철 패스를 끊고,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설명한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탑승하는 데까지 전혀 막힘이 없었다. 게다가 외국인과 대화를 하는 것이 마냥 편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데도, 친구는 자신의 일본어 실력이 통하는 것을 굉장히 즐기는 모습이었다. 여행에서의 큰 짐이 하나 덜어졌다는 생각과 동시에, 친구의 의기양양한 모습 앞에서 여행의 설레임은 한결 더 고조되었다.



 나리타 익스프레스가 내려준 시부야 역에서 덴엔토시센을 타고 숙소가 있는 산겐자야 역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가장 붐비는 동네인 시부야와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데도, 역 앞의 대로와 마트를 지나 조금만 들어가면 꽤나 조용한 동네였다.

 따스한 햇빛 아래,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는 디자인이 다 다른데 조화롭게 서 있는 집들, 길 옆으로는 약간은 연식이 되어 보이는 골동품 가게, 오픈 테라스가 있는 타코야끼 가게, 주인장과 얼굴을 마주 보고 먹어야 하는 라멘 가게, 600엔짜리 연어 도시락이 가판대에 올라가 있는 약간은 비린내를 풍기는 생선 가게, 어느 지브리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모습의 담쟁이덩굴로 뒤덮여버린 폐가, 그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 그런 골목길 풍경 사이로 자전거 뒷좌석에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아이를 태우고 가는 엄마, 귤 색의 시바견을 산책시키는 노인, 일본 교복을 입은 학생들, 그런 풍경들, 마치 상상 속에 있던 일본의 한적한 동네의 모습이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지는, 그런 곳이 산겐자야였다.

 체크인은 오후 세시인데 한 시쯤 도착해서, 캐리어만 방에 넣어 두고 동네 탐방에 나섰다. 으레 처음 드는 길이 그렇듯, 돌아오는 길로 똑같이 걸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와 버리고 말아서, 역까지 다시 가는 동안 모험을 하고 말았다. 덕분에 동네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보았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식당가를 거닐었는데, 쉽사리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의 집이 단 한 곳도 없었다. 친구는 일본어를 할 줄 알았지만, 일본 식당들은 일단 가게가 대체로 협소해서 옆 사람이라거나 주인장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고, 또 옵션은 어떻게 할 것인지, 가령 라멘을 먹으면 면의 굵기는 어떻게 할 것이며, 국물의 농도, 토핑, 밥을 추가할 것인지 따위의, 그들에게는 몸에 밴 친절이겠지만 외국인에게는 크나큰 장애물 같은 질문들에 대답을 해야 했기 때문에 섣불리 아무 가게나 들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식당들을 재고 재다가 일본에서 첫 끼니를 해결하게 된 가게가 "스키야"이다. 규동 3대 체인 중 하나, 그러니까 프랜차이즈 식당이라는 점, 그리고 꽤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있는 인테리어는 외국인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낮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요소들이었다.

 가게 앞에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던 490엔짜리 규동을 시켰다. 첫 끼니부터 감동의 도가니에 빠졌다. 고작 프랜차이즈 규동일 뿐인데도 말이다. 일단 490엔, 그러니까 4900원짜리 식사 치고는 양이 엄청나게 많았고 구성도 탄탄했다. 일본에서 음식을 먹는 내내 '우리나라에서 이걸 먹는다면 훨씬 비싼 돈을 내야 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그런 생각의 첫 신호탄이 "스키야"의 규동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8000원짜리 세트메뉴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먹었다. "일본 사람들은 소식을 한다.", "일본은 가격에 비해 양도 적게 나오고 반찬값도 따로 받아서 쫌생이 같다."는 말을 익히 들으며 자랐는데, 일본에서의 첫 끼니부터 그런 편견이 무참히 깨어졌다. 맛 역시 최고였다. 양념된 소고기는 불고기가 아닌 다른 맛이었고, 된장국 역시 우리나라의 된장찌개와는 다른 맛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반찬으로 나온 채소가 맵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기 때문 - 김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 이었을까, 밥과 국, 그리고 반찬이라는 한식과 별 다를 것 없는 구성을 하고 있음에도, 맛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느껴졌다. 다소 생소한 맛이었지만, 그래도 입에 꽤 잘 맞았다. 4박 5일 내내 490엔짜리 규동만 먹어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다.



 세시에 체크인을 하고 방을 둘러보았다. 아담한 방이었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작은 가구들을 배치했기 때문에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가구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침대였다. 푹신한 매트릭스 위에 라텍스까지 깔려 있었다. 노곤한 몸을 눕혔다가, 잠시 뒤 눈을 떠보니 두 시간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섬주섬 일어나 바로 옆 역인 시부야로 향했다.

 시부야는 도쿄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답게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특히 스타벅스 앞 사거리에는 주말 건대입구역 2번 출구 앞의 몇 배는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번화가여서 그런지 선남선녀들도 많았고, 외국인들 역시 심심찮게 보였다. 도쿄라는 대도시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일단은 하트만 기타즈라는 곳에 들러서 새 기타를 샀다. 우리나라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싼 가격에 기타를 살 수 있기 때문에, 기타를 사러 일본에 가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런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 20만원에서 30만원정도는 싸게 산 것 같다. 새로 산 기타를 받아 들고, 시부야에 2년 살았던 친구가 추천해준 스키야키 집의 한 시간짜리 웨이팅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난 뒤, 길 건너편의 타워 레코드로 향했다. 거기서 신선했던 것은, 건물 전체가 하나의 매장이라는 점이었다. 7층 이상 되는 건물의 각각의 층이 다른 장르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상품들이 가득히 채워져 있었다. 적어도 음반 관련해서는 이 건물 안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왜 도쿄를 쇼핑의 천국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일본에 다녀온 친구들 중 스키야키 예찬론자들이 있었다. 세상에서 맛있는 음식 순위를 매긴다면 위에서 다섯 번째 안에 들어갈 요리로 스키야키를 뽑을 정도로 느껴졌달까. 한국에 따로 스키야키를 파는 집이 있는지는 찾아보지 않았지만, 일본에 가게 된다면 꼭 스키야키를 먹어야겠다고 자연히 다짐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시간의 웨이팅, 2490엔이라는 가격, 그리고 심지어 스키야키 주문 자체에 음료수 무한리필권이 들어 있음에도 미련하게 따로 주문해버린 우롱차마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스키야키는 정말로 맛있는 음식이었다. 샤부샤부와 거의 비슷한 음식인데, 국물이 간장 베이스고 많이 졸여져 있다는 것, 그리고 날달걀에 고기를 찍어서 먹는다는 점이 달랐다. 큰 차이는 없는 셈인데, 그 작은 차이들이 엄청난 맛의 차이를 만들어냈다. 정신없이 먹던 도중 친구가 "날달걀에 찍어먹을 생각을 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천재가 틀림없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샤부샤부 집에 가서 날달걀을 찾을지도 모를 정도로, 막 익힌 고기에 날달걀을 듬뿍 묻혀 먹는 맛은 정말로 환상이었다. 상대적으로 밍밍한 맛의 샤부샤부 육수와는 다른, 소스로 다소 짠 간장 베이스를 사용하는 스키야키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합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거기에 야채, 당면, 두부도 육수가 적당히 스며들어서 정말 맛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식 하면 유명한 요리가 돈까스, 덮밥, 스시, 라멘 정도이고 그것들을 취급하는 식당을 국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인데, 스키야키는 앞의 것들에 비교하면 인지도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앞의 유명한 요리들 만큼이나 스키야키 역시 너무나 맛있어서, 한국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럽게 스키야키로 배를 채우고, 다시 산겐자야 역에 도착했다. 역 근처의 로손 편의점에서 호로요이를 맛 별로 하나씩, 그리고 내일 아침에 먹을 컵라면 두세 개를 사들고 숙소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낮에 봤던 전형적인 일본의 거리는, 밤의 어둠과 조명 아래에서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 손에는 맛있는 술과 아침거리, 등에는 새로 산 기타에, 아름다운 동네 풍경,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기분으로 향하는 안락한 숙소. 친구와 길을 걸으며, 여기 오길 잘 했다는 말을 수없이 건네며, 그렇게 도쿄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어 갔다.


2016년 초에 다녀온 도쿄 여행기입니다.


0. 여행이 찾아왔다 [출발]

1. 오길 정말 잘 했어 [산겐자야, 시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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